살아남는 신앙에서 살아가는 신앙으로
이민교회의 신앙 유산과 다음 세대
Heesung Hwang
Sep 12, 2026
한인들이 모인 교회의 풍경을 떠올리면 유난히 “열심”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새벽기도, 주일예배, 성가대, 속회와 선교회,교회학교 봉사, 주방 봉사, 각종 행사와 모임. 평일에는 생업으로 긴 하루를 보내고도 저녁이면 다시 교회로 향하고, 주말이 되면 또 공동체를 위해 시간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맡은 일을 쉽게 내려놓지 않았고, 누군가 “교회 일인데 해야지”라고 말하면 그것은 꽤 설득력 있는 이유가 되었다.
물론 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참여와 헌신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헌신 덕분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고 공동체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매우 피곤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좀처럼 자리를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때로는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저 권사님은 이제 좀 쉬셨으면 좋겠는데……” 하고 걱정할 정도의 모습을 마주하면서, 나는 이런 열심을 주로 과도한 헌신의 문제로 바라보곤 했다.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왜 신앙생활은 늘 바빠야 하고, 왜 잘 쉬는 것보다 많이 희생하는 것이 더 신실한 태도로 여겨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경험과 대화가 쌓이면서 나의 질문도 조금 달라졌다.
왜 우리 부모 세대의 믿음은 그토록 "열심"을 필요로 했을까? 왜 그렇게 "열심히" 모이고, 기도하고, 교회 공동체를 섬겼을까?
질문을 바꾸고 나니,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민자의 삶에서 교회는 단순히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장소가 아니었다.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익숙한 말을 들을 수 있는 곳이었고, 고향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취업과 정착에 필요한 정보를 얻고, 아이들을 믿고 맡기며, 외로움을 견딜 만한 대화 상대와 또래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사회에서는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하고 자신의 경력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이 교회에서는 집사님이 되고, 권사님이 되고, 성가대장이 되고,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1]
최근 미국 동부와 중부 지역의 한인교회 리더 경험자 16명을 인터뷰한 연구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확인된다. 연구에 참여한1세와 1.5세들은 외로움과 언어, 자녀를 한인교회에 참석하게 된 중요한 이유로 이야기했다. 어떤 참여자에게 교회는 “의지하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고, 또 다른 참여자에게는 자녀들이 같은 한인으로서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경험을 알아주는 친구들을 만나는 곳이었다.[2]
영어가 더 편한 1.5세와 2세에게도 한인교회는 단순히 부모 세대의 공간만은 아니었다. 연구의 참여자들은 부모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성인이 된 뒤에도 그곳에서 느끼는 익숙함과 편안함 때문에 다시 한인교회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한 참여자는 미국 교회에서는 늘 손님처럼 느껴졌지만 한인교회는 “따뜻한 집”과 같았다고 회상했다.[3]
신앙은 영혼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낯선 땅에서 삶 전체를 버티게 해주는 구조였다. 그렇다면 이민 1세대의 열심은 단순히 개인의 신앙심이나 헌신의 문제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희생하고 인내하며 공동체를 위해 "열심히" 자신을 내어놓는 신앙은 그들에게 실제적인 생존의 방식이었다. 삶의 불확실성이 컸던 만큼 공동체는 더 중요했고, 사회적 안전망이 약했던 만큼 교회 안의 관계망은 더 절실했다. 신앙과 교회는 믿음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삶을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이것을 생존의 신앙, Survival Faith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생존의 신앙은 부족한 신앙이 아니다. 여러가지 가능성 결핍된 상태에서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눈물로 드렸던 기도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이민자들에게 필요했던 신앙이었다.
낯선 땅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인내와 희생, 성실함과 공동체적 책임은 실제로 삶을 가능하게 했다. 그 신앙 덕분에 가정이 버텼고, 교회가 세워졌고, 다음 세대가 교육받았으며, 오늘의 우리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그러니 다시 정리하자면, 문제는 그 신앙의 유산 자체에 있지 않다.
문제는 생존을 위해 필요했던 신앙의 습관이 어느 순간 신실함의 유일한 기준이 되었을 때 시작된다.
열심히 하는 것이 신앙의 표준이 되고, 많이 희생할수록 더 좋은 교인으로 여겨지고, 거절하지 않는 것이 헌신의 표시가 되고, 힘들어도 참고 견디는 것이 성숙한 믿음처럼 이해되기 시작할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바쁨은 충성, 때로는 성공과 비슷한 말이 되고, 쉼은 게으름처럼 느껴지며, 자신의 필요를 돌보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교회 일인데 해야지.”
“다들 힘든데 나만 빠질 수 없지.”
“조금만 더 참으면 돼.”
“믿음으로 견뎌야지.”
“천국의 보상이 있을거야.”
이런 말들은 분명 어떤 순간에는 공동체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어려운 삶 속에서도 서로의 자리를 지키게 했고, 희생과 헌신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같은 말들이 반복되면서, 힘들어도 쉬지 못하게 하고 내려놓는 것을 죄책감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언어가 되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견디는 것을 믿음이라 여기고, 더 많이 희생하는 것을 더 좋은 신앙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나 역시 이러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앙은 끝없이 자신을 소진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 때로는 멈추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돌봄을 받는 것 또한 신앙의 한 모습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기까지 말이다.
실제로 한인 이민교회의 청소년 사역자들을 인터뷰한 연구에서는, 일부 참여자들이 주어진 일을 거절하거나 질문하는 행동을 믿음 부족이나 불순종으로 해석하는 위계적 문화를 경험했다고 말했다. 한 참여자는 맡겨진 일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거절하면 “믿음 없는 사역자”로 여겨지는 것이 한인교회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참여자들은 정해진 근무시간을 훨씬 넘어서는 업무, 충분하지 않은 보상, 지도와 인정의 부족 속에서 정서적 소진과 무력감을 경험했다.[4]
이 연구가 모든 한인교회의 모습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를 위한 희생이 신앙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때, 헌신의 언어가 어떻게 사람을 침묵시키고 소진시킬 수 있는지는 보여준다.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면 거절할 수 없고,불순종하는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으려면 질문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헌신은 더 이상 자유로운 사랑의 응답이 아니라 자신의 신실함을 계속 증명해야 하는 의무가 된다.
신앙에서 희생은 중요한 가치다. 문제는 희생 그 자체가 아니라, 희생만이 신실함을 증명하는 언어가 될 때다. 예수의 길에는 자기 비움이 있지만, 생명을 파괴하는 자기 소진이 신앙의 목적은 아니다.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과 자신을 끝없이 소모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이 둘을 충분히 구분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특히 세대가 바뀌면서 이 질문은 더 복잡해진다. 이민 1세대가 자주 물어야 했던 질문은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그러나 그들의 자녀와 손주 세대가 묻는 질문은 조금 다를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이 공동체 안에서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신앙은 나를 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가?”
같은 신앙의 언어라도 세대마다 다르게 들릴 수 있다. 부모 세대에게 “희생”은 생존과 사랑의 언어였지만, 자녀 세대에게는 자신을 감추고 참으라는 요구처럼 들릴 수 있다. 부모 세대에게 “순종”은 공동체를 지키는 미덕이었지만, 다음 세대에게는 질문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부모 세대에게 교회는 외로움에서 살아남게 해준 가족이었지만, 다음 세대에게 교회가 반드시 같은 방식의 안전한 공간인 것은 아니다.
물론 다음 세대와 한인교회의 관계를 단순히 거부와 이탈의 이야기로만 설명해서도 안 된다. 인터뷰에 참여한 2세들은 한인교회의 한국식 운영과 소통 방식에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그곳을 자신의 뿌리와 연결해주고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가르쳐준 공간으로 기억했다. 교회에서 맺은 친구 관계와 공동체적 친밀함 역시 계속 간직하고 싶은 긍정적 유산으로 평가했다.[5]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일방적인 단절이라기보다 양가적인 관계에 가깝다. 다음 세대는 한인교회가 전해준 문화와 소속감에 감사하면서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채 결론을 내리거나 부모와 자녀 같은 위계로 대하는 운영 방식에는 어려움을 느꼈다. 반대로 세대 사이에서 서로의 필요를 설명하고 통역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 2세 참여자들은 공동체에 남아 함께 사역하려는 의지를 보였다.[6]
그래서 다음 세대가 이전보다 덜 헌신한다고 쉽게 결론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
어쩌면 그들이 신앙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형성된 신앙의 언어만으로는 자신들의 삶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이전 세대와의 결별이 아니라, 자신들도 동등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중받으며 질문하고 참여할 수 있는 신앙일 수 있다.
그렇다면 시대가 달라진 지금, 우리도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어떻게 더 오래 버틸 것인가. 이 질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요즘 교회 안에서도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어떻게 하면 번아웃 없이 오래 사역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을 소진시키지 않으면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을까. 모두 중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가고 싶다.
생존에서 지속가능성으로, 그리고 지속가능성에서 풍성한 삶으로. Surviving. Sustaining. Flourishing.
생존은 묻는다.
“어떻게 버틸 것인가?”
지속가능성은 묻는다.
“어떻게 망가지지 않고 계속할 것인가?”
그러나 풍성한 삶의 신앙, Flourishing Faith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받았는가?”
신앙의 목적은 단지 우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안에서 생명이 자라고, 그 생명이 다른 사람의 삶도 살게 하는 것일까.
Flourishing Faith는 편안하고 고통 없는 삶을 뜻하지 않는다. 언제나 행복해야 한다는 요구도 아니다. 오히려 기쁨과 슬픔, 책임과 쉼, 개인의 필요와 공동체의 필요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한 사람의 삶 안에서 함께 자리를 얻는 상태에 가깝다. 고통을 감추지 않아도 되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해도 믿음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으며, 질문을 던져도 공동체 밖으로 밀려나지 않는 신앙이다.
한인교회의 청소년 사역자들에게 무엇이 소진을 견디고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를 살핀 연구에서도 관계와 쉼의 중요성이 드러났다. 참여자들은 동료 사역자와 공동체의 지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멘토, 업무의 분담, 하나님과 보내는 개인적인 시간, 그리고 사역에서 실제로 벗어나는 안식이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7] 이는 소진이 개인의 믿음 부족만으로 발생하는 것도, 개인의 의지만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님을 보여준다.
기도와 말씀은 분명 회복의 자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과 공동체가 의무로 부과한 종교 활동은 구분되어야 한다. 사람을 소진시킨 구조를 그대로 둔 채 더 기도하고 더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라고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회복을 말하려면 개인의 영성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업무와 관계, 권력과 보상의 구조도 함께 돌아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쉼은 다시 일하기 위한 충전 수단에만 머물지 않는다. 쉼 자체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성취와 헌신으로 얻어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배우는 시간이 된다. 자기 돌봄 역시 공동체적 책임의 반대말이 아니다. 나의 한계와 필요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일은 다른 사람의 한계와 필요도 더 깊이 존중하게 만드는 훈련이 될 수 있다.
풍성한 삶의 신앙은 희생을 버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공동체적 책임을 포기하거나 자기 자신만을 먼저 생각하자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물려받은 이민 신앙의 귀한 유산을 더 잘 분별해 이어가자는 제안이다. 희생과 함께 기쁨도 신앙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과 봉사뿐 아니라 쉼과 자기 돌봄도 신실함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공동체를 돌보는 것과 자신을 돌보는 것을 서로 반대되는 가치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 다음 세대에게 정답만 넘겨주는 대신, 그들을 동등한 대화의 상대로 맞아 함께 질문하고 결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한인교회의 세대별 의미를 살핀 연구 역시 2세를 더 이상 단순한 “자녀 세대”로 취급하지 말고 동등한 공동체 구성원으로 바라보며, 교회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소통의 통로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한다.[8] 무엇보다 Flourishing Faith는 이전 세대의 신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신앙이 우리에게 남겨준 선물은 이어가되, 그 과정에서 생겨난 상처까지 반드시 물려줄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이민 1세대의 열심 덕분에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새벽마다 기도하고, 긴 노동 뒤에도 교회를 지키고, 자신보다 자녀와 공동체를 먼저 생각했던 이들의 신앙을 가볍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희생에는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사랑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중요한 유산은 “계속 힘들게 살아라”라는 명령이 아니다. 분명히 아니다. 오히려 낯선 땅에서도 삶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믿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는 용기, 그리고 절망 속에서도 다음 세대를 위해 희망을 선택할 수 있다는 신앙이 아니었을까.
용기의 신앙.
희망의 신앙.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차례다.
그들이 그 시대의 질문에 신앙으로 응답했다면, 우리 역시 오늘의 질문에 응답해야 한다. 생존의 신앙은 결핍에서 비롯된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이민자들에게 필요했던 신앙이었다. 강력한 생명력과 회복탄성력을 증명하는 신앙이다. 그 간절한 신앙과 마음으로 그들은 낯선 삶을 견디고 공동체를 일구어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면, 오늘 우리에게 신실함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다시 물어야 한다.
어쩌면 이민 신앙의 다음 장은 더 신실하게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더 온전히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데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각주
[1] 장안리·조수안, 「재미한인들에게 한인교회의 역할과 의미 연구: 미국 동부, 중부지역의 1세, 1.5세, 2세들을 중심으로」, 『재외한인연구』 제71호(2025), 3-6쪽.
[2] 장안리·조수안, 앞의 글, 14-15쪽.
[4] Youngjun Kim, “A Grounded Theory Study of Burnout among Youth Workers in Korean Immigrant Churches,” Christian Education Journal: Research on Educational Ministry 17, no. 2 (2020), 377-381쪽. 연구 대상은 캘리포니아 한인이민교회의 청소년 사역자 20명이다.
[5] 장안리·조수안, 앞의 글, 20-21, 24-25쪽.
[6] 장안리·조수안, 앞의 글, 18-19, 25쪽.
[7] Kim, “A Grounded Theory Study of Burnout,” 384-387쪽.
[8] 장안리·조수안, 앞의 글, 25-27쪽.
참고문헌
장안리·조수안. 「재미한인들에게 한인교회의 역할과 의미 연구: 미국 동부, 중부지역의 1세, 1.5세, 2세들을 중심으로」. 『재외한인연구』 제71호, 2025, 1-35쪽. https://doi.org/10.38184/ASK.2025.71.1.
Kim, Youngjun. “A Grounded Theory Study of Burnout among Youth Workers in Korean Immigrant Churches.” Christian Education Journal: Research on Educational Ministry 17, no. 2 (2020): 373-391. https://doi.org/10.1177/0739891320926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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