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백인인가? — 인종의 경계와 신학의 책임
경계의 언어를 넘어, 하나님 나라를 묻다
Heesung Hwang
Sep 29, 2026
이번 학기 내가 가르치는 과목 중 하나에서는 사회 안에 겹겹이 작동하는 억압의 구조를 많이 다룬다. 지난 2주 동안에는 특히 미국의 인종주의 역사를 살펴보며 학생들과 한 가지 질문을 반복해서 나누었다.
인종은 언제부터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방식으로 존재했을까?
진구섭의 『누가 백인인가?: 미국의 인종 감별 잔혹사』 (푸른역사 2020)는 이 질문에 꽤 불편하면서도 분명한 답을 건넨다. 우리가 너무 쉽게 자연적인 구분이라고 생각해 온 ‘백인’, ‘흑인’, ‘황인종’이라는 범주는 사실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누가 백인으로 인정되고 누가 그 경계 밖으로 밀려나는지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피부색만으로 결정된 것도 아니었다. 법과 과학, 종교와 경제적 이해관계가 함께 그 경계를 만들고 다시 그렸다.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누가 백인인가?”라는 질문이 실제로 법적 질문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는 자격이 백인에게 제한되어 있던 시절, 법원은 실제 사람을 앞에 두고 그 사람이 ‘백인인가 아닌가’를 판단해야 했다. 과학적 분류를 가져오기도 했고, 당시 사회의 ‘상식’을 기준으로 삼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분명 백인으로 여겨지는 일부 유럽계 이민자들조차 한때는 그 경계 위에 불안하게 서 있었다.
결국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간단하다.
인종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졌다.
나는 수업에서도 이 지점을 꽤 자주 반복한다.
Race may be socially constructed, but racism has very real consequences. [1]
인종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범주라고 해서 인종차별의 현실까지 허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람이 만든 경계이기 때문에 그 경계를 유지하기 위해 법과 제도와 문화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재산과 시민권과 안전을 얻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것들을 빼앗겼다.
물론, 진구섭의 이 책은 내가 수업에서 직접 사용하는 교재는 아니다. 한글로 되어 있기에... 오히려 내게 이 책의 의미는 다른 데 있었다. 미국에서 영어로 인종 문제를 가르치고 영어로 쓰인 이론과 역사 자료를 계속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이 문제를 미국 학계의 언어와 사고 틀안에서만 처리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을 한국어로 읽으면서 같은 문제를 내가 가장 오래 사용해 온 언어로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생각보다 중요했다.
한국어로 읽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익숙해진 영어 개념들이 조금 낯설어졌다. 오히려 그 낯섦 덕분에 한 걸음 떨어져 구조를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수업에서 다루는 인종주의의 역사와 이론을 한국어의 문장과 사고 체계 속에서 다시 배열해 보는 과정은이 문제를 감정적으로만 소비하지 않고, 조금 더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정리하도록 도와주었다. 동시에 ‘미국의 인종 문제’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한국인 이민자인 나 자신의 언어와 역사, 그리고 미국 사회 안에서 아시아인이 차지해 온 위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조금 더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수업에서는 미국 인종주의의 역사를 하나의 긴 타임라인으로 펼쳐 놓았다. 노예제, 원주민 강제 이주, 중국인 배척, Jim Crow,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 이민법, 주거 분리, Civil Rights Movement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건을 살펴본 뒤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기에서 무엇이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이 타임라인에는 무엇이 빠져 있는가?
흥미로운 것은 학생들이 곧 역사책에 기록된 사건만을 이야기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교회의 침묵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가족사를 떠올리며, 또 누군가는 미국 밖에서 경험한 식민주의와 인종의 기억을 꺼낸다.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다보면 인종주의가 어느 한 집단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와 권력관계가 연결되어 만들어진 구조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수업을 가르치는 나 자신 역시 그 구조 바깥에 서 있지 않다.
나는 미국의 인종주의를 분석하고 가르치는 사람인 동시에, 그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기도 하다. 미국 사회 안에서 인종화된 몸을 살아가는 아시아계 이민 여성으로서, 나는 이 문제를 완전히 외부에서 바라볼 수 없다. 어떤 순간에는 교수라는 위치가 나에게 권위를 주지만, 다른 순간에는 아시아인, 여성, 이민자라는 위치가 교실 안팎의 권력관계를 더욱 예민하게 느끼게 한다. 인종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완전히 외부에 서 있는 관찰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국의 흑백 인종사에서 가장 중심적인 경험의 당사자라고 말할 수도 없다.
바로 그 중간의 위치가 이 수업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흑인 공동체의 경험을 대신 말하지 않으면서도 인종주의의 구조를 분명하게 가르쳐야 한다. 동시에 아시아계 이민자의 경험을 주변적인 예외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모든 차별을 같은 것으로 평평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성별과 이민 경험, 언어, 계급, 종교의 차이까지 더해지면 교실은 훨씬 더 복잡해진다.
때로는 학생들이 인종 문제를 너무 빠르게 흑백의 구도로만 이해하지 않도록 돕고 싶다. 그러나 그 복잡성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미국 사회에서 반흑인 인종주의가 지녀 온 역사적 중심성을 흐리고 싶지도 않다. 또 어떤 학생들에게는 인종에 관한 대화 자체가 자신의 정체성과 경험을 건드리며 방어와 상처를 불러오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수업을 가르칠수록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정답을 말하는 것’보다 자신의 위치를 인식한 채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것은 누구의 경험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그리고 내가 보지 못하고 있는 역사는 무엇인가.
『누가 백인인가?』에서 내게 가장 오래 남은 부분은 저자가 인종을 만들어낸 주체로 교회, 과학, 법을 함께 살펴본다는 점이다. 특히 신학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교회’가 이 목록의 맨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 성경은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고, 신학은 인간 사이의 위계를 마치 하나님의 질서인 것처럼 설명하기도 했다. 교회는 인종주의의 피해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구조를 만들고 지탱하며 때로는 신성한 언어를 빌려 정당화한 기관이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질문은 더 이상 “과거에 누가 백인으로 분류되었는가”에만 머물지 않는다. 더 근본적으로는 누가 인간을 나누고, 누가 다른 사람의 존엄과 소속을 결정할 권한을 가져왔는가를 묻게 한다. 그리고 신학은 그 질문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신학교 교실에서 인종주의를 가르치는 일은 단순히 “과거에 이런 나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배우는 데서 끝날 수 없다.그렇다고 “지금도 이런 일이 계속되어 화가 나고 지친다”는 감정에만 머물 수도 없다. 결국 우리는 더 불편하고 더 어려운 질문앞에 서게 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성서 해석과 신학 언어는 누구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누구를 경계 밖에 세우고 있는가?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 사랑은 실제로 누구에게 복음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누구에게는 여전히 복음으로 들리지 못하고 있는가?
오늘 수업 마지막에 학생들에게 이런 문장을 완성해 보게 했다.
“A theology that resists racism would…”
인종주의에 저항하는 신학은 무엇을 할 것인가.
아마도 그 신학은 먼저 우리가 너무 자연스럽다고 믿어온 경계를 의심하게 해야 할 것이다. 누가 중심이고 누가 주변인지, 누가 정상이고 누가 낯선 사람인지 묻게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만들어진 경계를 조금 더 친절하게 관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경계 자체가 왜 존재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이 고백하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우열과 위계로 나누는 그 어떤 경계도 궁극적인 권위를 가질 수 없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고백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누군가를 덜 인간답게 만들고 주변으로 밀어내는 모든 질서에 대한 저항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종주의에 저항하는 신학은 경계를 조금 더 공정하게 관리하는 차원에 머물 수 없다. 그 경계가 하나님의 뜻인 양 절대화되는 순간 그것을 드러내고, 질문하고, 흔들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무너뜨려야 한다.
바라건대, 그 자리에 배제와 위계 대신 사랑과 정의를, 경쟁과 고립 대신 상호의존과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를 세워 가는 것. 나는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말해 온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내는 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1] 참고. “Like citizenship, RACE is a political system that governs people by sorting them into social groupings based on invented biological demarcations. Race is not only interpreted according to invented rules, but, more important, race itself is an invented political grouping. Race is not a biological category that is politically charged. It is a political category that has been disguised as a biological one. The very first step of creating race, dividing human beings into these categories, is a political practice.” Dorothy Roberts. Fatal Invention: How Science, Politics, and Big Business Re-create Race in the Twenty First Century. The New Press, 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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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그 자리에 배제와 위계 대신 사랑과 정의를, 경쟁과 고립 대신 상호의존과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를 세워 가는 것. 나는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말해 온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내는 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 참 좋은 글입니다. 저도 그런 하나님 나라를 꿈꿉니다
성경이, 신학이, 교회가 배제와 차별, 폭력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과거, 현재의 사실이 참 슬프게 합니다. 상호의존과 연대, 이해와 포용이 가득한 공동체들이 세워지기를 꿈꿉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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